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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부스러기 7

오랜만에 찾은 엄마

추석 명절을 맞아 충북 음성군에 위치한 납골당에 다녀왔다. 많이 못찾아 가서 미안하고 보고싶다. TO. 사랑하는 엄마에게엄마, 나야 승근이. 엄마 하늘로 가고 난 뒤에 이렇게 편지 써보는게 처음인 것 같네. 살아 있을때도 못 써줬는데. 앞으로 자주 쓸게. 거기서는 잘 지내고 있지? 엄마 죽고나서 나 많이 힘들었어. 때아닌 원망도 들기도 했고 그래도 잘 이겨내서 대학교 졸업도 했고 지금 그래도 괜찮은 회사 잘 다니고 있어. 졸업식 때나 첫 월급 받았을 때 엄마생각 많이 나더라고. 검마랑 같이 사진도 찍고 내가 맛있는 것도 사주고 이쁜 옷도 사줄 수 있는데...엄마 왜이리 일찍 떠났어...내가 진짜 잘 해줄 거였는데. 나 그래도 엄마한테 고마워. 엄마가 나 이 세상에 낳게 해주고 키운 덕분에 잘 살고 있고 ..

엄마, 마지막 통화

나는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엄마와 떨어져서 지냈다. 그러면서 일주일에 한 번씩 통장으로 용돈을 받았다. 2003년 1월, 유독 추웠던 그날은 용돈이 들어오는 날이었다.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오전부터 잔액확인을 했지만, 통장에 입금내역은 없었다. 나는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보채다가 기어이 짜증을 부린다. 엄마는 오히려 나를 다독이고 바로 보내준다고 하였다. 뭔가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내 입이 미안함을 표시하기에 철이 덜 들었다. 그것이 엄마의 마지막 목소리였다.어렸을 적, 나는 엄마의 허벅지에 파묻혀서 엄마가 내 귀지를 파주는 것을 좋아했다. 약간 따끔거리지만 귀 안의 이물질이 제거되는 느낌이 좋았고 무엇보다 파묻힐 때 느껴지는 엄마의 따뜻한 촉감이 좋았다. 하지만 나는 나이를 먹을수록 엄마를 멀리하게..

뽀삐

오늘은 강아지 이야기에 관한 부스러기를 모아본다. 나는 애완동물을 키워본 적이 몇 번있다. 하지만 그때 키운 기간은 그렇게 길지가 않다. 강아지, 고양이를 키워봤었는데 오늘은 강아지 이야기를 해본다.초등학교 3학년 시절이었다. 그때 당시 나는 전북 김제 근처에 살고 있었다. 우리 가족은 국도변에 작은 슈퍼마켓을 하고 있었다. 손님들은 동네 주민들이 주를 이루었다. 어느 날, 부모님이 새끼 강아지 한 마리를 데려왔다. 품종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작은 몸에 하얀 털을 가졌던 것으로 보아 아마 말티즈 이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해본다. 나의 친형은 이 강아지가 2번째 키우는 것이라고 하지만 나는 이 강아지밖에 기억이 나지 않는다. 우리는 이 강아지에게 '뽀삐'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지금 들어보면 참 촌스러..

추억의 공간, 싸이월드

싸이월드. 우리는 줄여서 싸이라 불렀다. 2005년 나는 서울 소재 M전문대학에 입학하였다. 고등학교를 벗어나 학과, 동아리에서 만난 사람을 만나면 우리는 "싸이 해?"라 서로 묻고 일촌을 맺었다. 이때, 일촌명은 상당히 나의 머릿속을 아프게 했다. 가볍지도 않고, 무겁지도 않은 일촌명을 선택하는 것, 그리고 많은 사람들 각각을 짓는 것은 정말 힘들었다. 그렇게 우리는 싸이를 통해 관계의 끈의 시작을 끊었다. 그때 당시에 미니홈피는 필수가 아닌 필수였다. 서로 자기가 원하는 사진을 퍼가고, 방명록, 일촌평을 남기면서 컴퓨터 앞에 앉아 Today 숫자를 확인하고는 했다. 그러면서 파도를 타면서 친구들 미니홈피를 돌아다니고 좋아하는 연인이 있다면 몰래 들어와서 그 사람에 대해 훔쳐보는 소소한 재미를 누리고는..

박찬호

고등학교 시절, 박찬호가 등판하는 날이면 수업몰래 라디오로 경기중계를 들었던 기억이 있다. 메이저리거 박찬호는 아시아 선수로는 메이저리그 최고인 125승을 달성한 투수이다. 이 기록은 일본 노모 히데오(123승)을 뛰어넘는 대기록이다. 이렇게 유명한 그에게도 그늘은 있었다.박찬호의 시작은 순탄치 않았다. LA다저스에서 마이너리그로 강등되기도 하였고, 부상에 걸려 선수의 생명이 끝이라는 악재도 닥쳤다. 그러나 그는 인간이 가진 세 가지(지적, 신체적, 정신적)능력 가운데 정신력이 강했다. 모든 사람이 끝이라고 생각하는 한계지점에서 다시 한 걸음 내디디는 용기를 가졌다. 이 선수를 보니 나도 그랬다. 하나뿐인 어머니를 잃고 방황하던 시절 혼자 라면을 끓여 먹으며 눈물로 외로움을 달랜 적도 많았다. 박찬호가 ..

미숫가루

바람이 매섭다. 이런 날에는 따뜻한 아메리카노가 마시고 싶다. 언제였더라. 내가 아메리카노를 마시기 시작한 때가. 아마 어른이 되었을 무렵일 것이다. 어른이 된다는 것. '에스프레소에 뜨거운 물을 넣으면 아메리카노가, 시원한 물과 얼음을 넣으면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된다'는 것 따위의 정보를 외웠다가 자랑스럽게 써먹기 시작하는 것 말이다. 내가 어렸을 때는 아직 한국에 '아메리카노'라는 커피가 들어오지 않았다. 커피라고 해봐야 맥심이나 보통 믹스 커피를 마시던 시절이었다. 하물며 최신 문화와는 거리가 멀었던 어느 시골마을은 어떠했을까. 그 시절 부모님은 카센터를 운영하셨다. 햇빛이 뜨겁게 내리쬐는 여름이 되면 학교를 마치자마자 부모님이 계신 카센터로 달려 갔다. 내가 오면 엄마는 스텐 대점에 얼음을 동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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